Monday, March 7, 2011

중년 이후 전성기 맞은 배우 김혜옥

“폭탄 머리는 어떨까요?”
김혜옥은 인터뷰 전날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사진 촬영을 위해 이런 저런 상의를 하다가 헤어스타일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폭탄 머리요?” 기자가 되묻자 “네, 폭탄 머리요!” 평소 그녀의 분위기로 봤을 때 잘 그려지지 않는 스타일. 알고 보니 폭탄 머리는 영화 <육혈포 강도단>에서의 콘셉트다. 2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연기에 몰입하면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있다”는 그녀의 말이 정말 맞았다. 한참 <며느리 전성시대>에서 표독스런 시어머니로 연기할 때와 달리,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밝다.

대선배와의 작업, 어려웠지만 많은 걸 배웠다

할머니 강도단을 그린 영화 <육혈포 강도단>의 인기가 뜨겁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나문희, 김수미, 김혜옥. 평균 나이 65세, 마파도를 잇는 ‘노익장’ 영화로 화제가 되고 있다. 감독은 처음부터 이 세 배우를 염두하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처음 김혜옥은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고는 기뻤다. 그간 주로 젊은 배우들의 엄마 역할을 맡다 보니,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에 매력을 느꼈던 것. 이 영화에서는 젊은 배우라야 임창정 정도다. 그러나 마냥 좋아하기에는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우선 <솔약국집 아들들>, <두 아내>, <망설이지 마> 등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만 세 편, 불교방송에서 라디오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었다. 도저히 스케줄을 뺄 수 없는 상황. 게다가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은 그녀가 평소 어렵게만 생각했던 대선배들이었다. 김수미는 일곱 살, 나문희는 열일곱 살이나 많다.
“예전에는 선배들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다녔어요. 10년만 차이 나도 선생님이거든요. 김수미 선배님은 <전원일기>에 함께 출연하면서 곁에서 보는 것만 해도 공부가 되던 분이었어요. 김수미 선배님은 후배들에게 약간 까칠하세요. 본인도 그걸 아세요. 저도 확 트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이번 작품에 자신이 없었어요. 나문희 선배님은 엄마 같지만, 작품에 한해서는 굉장히 반듯하신 분이시고요.”
그래도 출연을 결정한 것은, 이 영화가 김혜옥에게 시간적인 어려움과 선배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길 정도로 매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걱정 속에서 대선배들과의 작업이 시작됐다.
“작품을 많이 하다 보면, 웬만한 감정에는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 영화를 하면서 많이 울고 많이 웃었어요. 선배들과 연기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덕분에 NG를 냈죠. 두 분은 연기가 대단하시거든요. 한수 배웠다고나 할까요? 옆에서 지켜보면서 ‘연기의 경지가 틀리구나’ 느꼈어요.”
김혜옥은 영화 작업 내내 김수미의 애드리브에 뒤로 넘어갈 정도로 웃었고, 나문희의 눈빛만 봐도 눈물이 났다.
“이분들 연기에 괜히 열광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연기가 삶 자체에서 묻어나는 것 같아요. 여러 풍파를 겪으며 살아오셨잖아요. 노력도 많이 하시고요.”
나의 비장의 무기는 ‘노력’
김혜옥은 선배들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나이 드는 게 두려움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선배들과 연기하다 보니 ‘나의 미래도 멋지겠다’고 생각되더라고요. 순간순간 사는 것이 너무 좋아요. 내 앞의 미래는 지나온 과거보다 훨씬 밝다고 생각해요.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지금의 내가 좋아요.”
김혜옥은 지난 5년 동안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렸다. 그녀만큼 많은 작품에 출연한 중년 배우는 없다. 어떤 캐릭터든 천 가지 얼굴로 소화해내 2007년 KBS 연기대상 여자 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저처럼 재주 없는 배우도 없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건, 제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능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게 콤플렉스였어요. 주변에 재능 많고 미모가 출중한 분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분들에 비하면 저는 너무 모자란 거예요. 제 무기는 노력뿐인데, 그 비장의 무기가 진가를 발휘했던 것 같아요.”
자신이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어느 순간 장점이 되었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낼 수 있었기에 다양한 캐릭터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앞만 보고 달린 탓일까? 한동안 슬럼프에도 시달렸고, 체력적인 한계에도 부딪쳤다.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요즘에는 조금 버겁다 싶어요. 일할 때는 즐거웠는데 가끔은 짜증이 나기도 하고요. 이젠 휴식이 좀 필요한 것 같아요. 한창 바쁠 때는 몰랐는데, 드라마 <망설이지 마>를 끝내고 긴장이 풀어지더니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더라고요. 이젠 내 몸을 위한 시간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요.”

뒤늦게 딸을 인정했던 아버지,
항상 편이 되어주시던 어머니

가족은 늘 김혜옥에게 가장 든든한 지원자다. 특히 이번 영화를 가장 기대했던 가족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영화 예고편을 보시고는 엄마가 무척 좋아하셨어요. 평소 드라마도 모니터를 많이 해주셨지만, 그동안 영화는 거의 젊은이들 이야기여서 공감하지 못하셨거든요. 이번 영화는 할머니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더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개봉하면 꼭 보겠다고 하셨죠. 그래도 식구들은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요. ‘예쁘다’‘밉다’정도죠. 무조건 내 딸이 잘한다 하시고요.”
김혜옥은 지난 3월에 열렸던 기자 시사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은 마침 아버지의 49제였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만 알렸던 아버지의 죽음은 시사회를 통해 알려졌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건 아니셨어요. 계속 병원에 계셨죠.”
김혜옥은 아버지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쉽게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잠시 고인을 생각한 듯 숨을 고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제가 배우인지도 잘 모르셨어요. 드라마는 잘 안 보셨으니까요. 그러다 병원에 계시면서 딸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거예요. 병원에서는 TV를 많이 보게 되잖아요. 그 덕분에 제가 드라마에 제법 많이 나오는 배우라는 걸 알게 되셨죠. 게다가 딸이 병원에 오면 많은 분들이 좋아하니까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아버지는 그녀 덕분에 VIP 대접을 받았다. 든든한 백이 되어주는 딸이 아버지 입장에서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까. 그러나 아버지에게 인정받은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그녀를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젠 어머니 건강도 좋지 못하다. 그리 기대하던 딸의 영화도 아직 보지 못했다.
“엄마는 당뇨를 앓고 계세요. 오래 앉아 있거나 닫힌 공간 속에 앉아 있지 못하죠. 혈액 순환이 안 되거든요. 영화는 극장에서는 못 보고, DVD가 나오면 집에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건강이 안 좋으시니 여행도 못하시고….”
그녀의 얼굴에 잠시 고통스러운 표정이 지나간다. 그러나 이 역시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냥 주어지는 시간은 없다고 해요. 고통이 온다면 그건 삶에서 꼭 필요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행복이 오면 꼭 와야 하는 시간이고요.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진리인 것 같아요.”
힘들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녀를 지켜준 건 다름 아닌 종교였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 신자다. 아무리 바빠도 불교방송 진행을 놓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종교는 나의 등불이자 길이에요. 갈 길을 몰라 헤맬 때 길을 찾아주고,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을 알려줘요. 헤매고 허우적거리며 살다가 불교를 만난 뒤 나의 심리가 이런 거였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그곳에 진리가 있었죠. 경전 그대로 살기는 힘들지만 많이 도움이 돼요. 제겐 종교가 심리 치료사라고 할까? 카운슬러가 따로 필요 없어요.”
김혜옥은 오래전 남편과 사별했다. “사랑은 안 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매순간 한다”며 웃는다.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요. 저 남자 좋아해요. 사랑 없이는 못 살아요. 이성이든 동성이든 매 순간 사랑하죠. 결혼요? 사랑하면 결혼도 해야죠. 아직 계획은 없어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건 사람이이에요. 사람만 좋다면 어떤 고생도 감수할 수 있어요.”
김혜옥은 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녔다. 계산에 서툴고 소녀처럼 로맨틱한 사랑을 꿈꾼다. 순수한 사람의 특권일까. 그녀는 행복이나 성공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만족하고 즐거운 것, 그게 행복 아닌가요? 사랑하면서 웃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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