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6, 2011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아닌 ‘사인’을 밝히는 의사 이야기



SIGN : [뜻] 1. 징후, 조짐, 기색, 흔적
 2. 몸짓, 신호, 표시
‘생전 처음 맡아본 냄새였다’
배우 박신양이 드라마 <싸인>을 시작하기 전 3~4개월 동안 전국을 다니며 부검에 참관한 후 한 이야기다. 지난겨울, 그는 100구가 넘는 시신을 부검하는 현장에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이를 임신한 임산부의 사체도, 생후 5일 된 아이의 시신도 있었다. 부검 현장을 보고 온 날은 한 잔 이상 마시지 못하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고 했다. 윤지훈이라는 법의학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최소한이라도 알기 위해 내린 결정. 연기 전 작품의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가 몇 달간 관찰하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다. 치열했던 준비 과정이 작품 중반을 지난 지금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엄청요. 엄청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법의학자라는 자신감을 줬고 그렇게 밀어붙일 수 있는 오기도 생겼어요. 실제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그들의 삶을 보고 왔기 때문에 내가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게 맞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게 없었다면 지금처럼 하지 못했을 거예요.”
박신양은 드물게 일관성을 지닌 배우다. 카메라가 켜져 있든 그렇지 않든, 작품에서든 일상에서든 그의 자세는 한결같다. 공백기간 동안 화제가 됐던 ‘일산 자유로에서 고라니를 구조’한 사건은 오래전 낚시 바늘이 목에 걸렸던 강아지를 구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비롯됐다. <싸인> 일본 촬영 현장에서 만난 팬들에게 많이 웃어주지 못한 건 지금도 못내 마음에 걸린다. 고지식할 정도의 일관성이 때론 까다로움으로 보이게 만들지만,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이날 함께한 연기자들이 그를 지칭할 때 ‘박신양 씨’가 아닌 ‘박 선배님’이라고 한 건 빈말이 아니다. 김아중은 박신양과 호흡을 맞추며 ‘작품을 하면서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도 상대 배우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고,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형사 역의 정겨운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있는데, 나중에 화면을 보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게 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극 중 연인이었던 검사 정우진(엄지원)의 대사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왜 선배를 좋아했는지 알아. 선배는 처음으로 날 이끌어준 사람이어서야.”

현장에서 그를 움직이는 기준은 하나다. 연기에 도움을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다. 수십 명에 이르는 현장 스태프들에게 초콜릿과 와인을 돌리는 귀여운 배려는 현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그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매 순간 연기를 체크하는 디렉터 팀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높은 시청률 역시 그에게는 ‘현장에 활기를 주어 (작품이 좋아지기 때문에) 고마운’ 수치다. 그의 연기를 둘러싼 외연은 오직 하나로 수렴된다. ‘연기, 그리고 작품.’
“현장에 제 전담 팀이 있는 건,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면 제가 맨정신으로 있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하루에 30분에서 2시간을 자는데 그러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어렵거든요. 물론 현장에도 스태프와 전문가들이 계시지만 이분들이 저만 봐주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누군가는 제 곁에서 ‘잘못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평균 수면 시간 2 시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빡빡한 스케줄, 그 와중에 누군가 곁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연기를 지적한다면 그걸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그런 길을 간다. 환경이 열악해서 스케줄이 꼬여서…등 현장에서 얼마든지 나옴직한 변명 뒤에 숨지 않는다. 그 안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낸다. 덕분에 카메라에 비친 그의 연기는 카메라 뒤의 치열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편안하다. 힘을 줄 장면과 힘을 뺀 장면이 구분이 확실하고, 그 연결이 유연해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정말 순수하게 그 인물로 서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윤지훈이 천재여서’가 아니라 ‘눈빛으로 얘기하는 걸 보면’ 그의 부검은 진실일 것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건 권력도, 인맥도 갖지 못한 윤지훈이 가진 유일한 힘이기도 하다.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은 제작비용으로, 드라마의 성공도는 시청률이라는 수치로 환산되는 작금의 현실은 장인정신을 가지고 한 땀 한 땀 연기를 수놓는 배우에게 때로 잔인하다. <쩐의 전쟁> 촬영 당시, 제작사의 무리한 연장 요구로 촉발된 출연진과 제작진의 갈등은 종국에는 ‘배우가 고액의 몸값을 요구해 제작에 무리를 끼쳤다’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자본에 종속된 현실의 폐단을 작품의 대표 배우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으로 흐지부지하게 만든 것. 지난한 소송 끝에 재판부는 박신양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탓에 <바람의 화원>이후 <싸인>은 2년 만의 드라마다. 복귀 심경을 묻는 이들에게 그는 담담히 답했다.
“저는 어디에도 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윤지훈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김아중은 영리한 배우다.
작품이 배우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알고, 대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를 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드라마틱한 ‘미녀 변신’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드라마 <그저 바라만 보다가>에서도 역시 스타 한지수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그가 <싸인>의 신참 법의학자가 된다고 했을 때 위화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껏 그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꽃미녀’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미모를 부정하기보다 균형점을 찾아냈다. 털털한 성격을 보여주는 머리와 옷차림 그리고 여전한 미모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제 그의 별명은 ‘꽃거지’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영리한 부분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제가 나이에 비해(그는 올해 서른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작품 속에서 맡아왔던 비중에 비해 작품 경력이 많지는 않아요. 그런데 <싸인>이라는 드라마를 만나 박신양 선배님과 작업을 하게 된 건 지금의 저에게 꼭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하면서 상대 배우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본 건 처음이거든요. 근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 이야기들이 작품을 어떻게 바꾸는지 배우고 있어요.”

외골수 기질이 다분한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은 천재이긴 하지만 모두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확신에 찬 ‘미친 존재감’으로 주변을 다소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고다경(김아중)은 작품 속에서 시종일관 윤지훈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껏 그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꺼져”인데도, 그는 그렇게 쉽게 꺼져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적 존재인 윤지훈에게는 없는 감성, 놀라운 ‘촉’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법의학 드라마가 처음이다 보니까, 미국의 CSI와 비교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아무래도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CSI는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에 집중하잖아요. 그런데 <싸인>은 사건이 ‘왜’ 발생했느냐에 집중해요. 그게 <싸인>과 CSI의 가장 큰 차이인 거 같아요.”
법의학자 윤지훈과 고다경에게 부검은 ‘죽은 자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다. 증거는 조작될 수 있고, 산 사람은 거짓을 말할 수도 있지만 죽은 사람은 거짓을 들려주지 않는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매회 촘촘히 전개되느라 정작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사이에서는 으레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이렇다 할 러브라인이 생길 겨를이 없다. 신기한 건 그럼에도 작품에서 전혀 미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자기야’ ‘여보야’ 하는 작품에서 만났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박신양 선배님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존경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보다 못하지 않잖아요. 그 사람 앞에서는 나를 더 발전시키고 싶고 만날 때마다 설레고요.”   
역시, 그녀는 영리했다.

엄지원은 화면발이 잘 안 받는 배우다.
 현장에서 본 그는 화면에서보다 고왔다. 뽀얀 얼굴은 갸름하고 전체적인 선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퇴근 후 TV를 켜고 <싸인>을 보다 엄지원이 등장했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에서 누구보다 활기차 보였다. 남들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정우진의 모습 그대로.
엄지원이 맡은 검사 정우진은 강한 여자다. 누구의 도움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씩 쟁취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패하더라도 혼자서 견딘다. 사법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울면서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공이 맞을 때까지 휘두르고 또 휘두르며 분을 삭였다. 검사가 된 후로는 증거불충분으로 풀어준 방화범이 연쇄살인범인 것으로 드러나 징계를 받는다. 이번에는 후드점퍼를 입고 문방구 앞에 앉아 전투적으로 오락기를 두드린다. 역경에 처한 여자 우진은 스스로를 구제한다.  
“대본을 읽고 나서 머리를 잘랐어요. 정우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봤거든요. 이 여자, 머리를 질끈 묶었을까. 아니면 그들(남자)처럼 했을까. 후자였을 거 같았어요.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여자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이들과 경쟁하려면 머리든 의상이든 이 사람들보다 더 세게, 더 치열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오기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죠.”
엄지원의 설명대로 <싸인>은 장르물이다. 이전에 해왔던 작품과는 다르기 때문에 매회 고민도 거듭된다. 그때마다 그는 동료들의 얼굴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작품하면서 (고)현정 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홍상수 감독님 작품에서처럼 공기 같은 연기도,
<선덕여왕>에서의 표독한 연기도, 또 <히트>에서 형사 연기도 너무 자연스러웠던 게 새삼 놀라웠어요. 언니는 그 안에서 계속 변하거든요.”
엄지원 역시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리얼과 판타지의 중간 즈음, 아슬아슬하다기보단 경쾌하게, 줄타기를 하듯 그녀는 한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맞는다. 또 맞는다.
 거의 매회 빠짐없이 맞는다. 그래도 덤빈다. 덤비고 또 덤빈다. <싸인>의 열혈형사 최이한(정겨운)의 모습이다. 제작발표회에서 ‘아이돌 같은 형사’를 보여주겠다고 밝힌 포부답게 매회 패셔너블한 모습을 선보이지만 ‘(패션에 대해) 생각만큼 반응이 뜨겁진 않다’며 멋쩍게 웃었다. 
“형사 같지 않은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런 형사도 있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근데 형사 같지 않게 거의 매회 맞더라고요. 변호사한테 맞고 하수인들한테 맞고 심지어는 법의학자(윤지훈)한테까지 맞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 무슨 형사가 이렇게 많이 맞냐’고.”
욕심 같아서는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도 찾아내고 싶고, 범인을 제일 먼저 잡고 싶기도 한데 10부가 방영된 지금까지는 아직 결정적인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영하의 날씨에 뛰고 뛰고, 넘어지고, 구르고, 다쳤다. 어느 날은 감독에게 물었다. ‘너무 주인공 위주로만 가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장항준)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너도 주인공이야.’ 그리고 너는 대사할 때보다 액션할 때가 편집이 덜 된다.(웃음) 이제 작가로 가셨으니까 ‘앞으로 좋은 얘기 많이 써준다’는 약속 지키시겠죠.”
초반의 임팩트는 법의학자 윤지훈이, 중반의 탄력은 고다경의 촉수가 이끌어냈다면 후반부는 형사 최이한의 활약에 기대해도 좋겠다. 여기에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해가는 정우진-최이한 콤비의 만담은 덤이다.  


- (위)가장 중요한 장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실의 모습이다. 법의학자뿐 아니라 연구원으로 출연 중인 안문숙, 정은표, 문천식 등은 극의 리얼리티를 높이는 동시에 극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감초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래 왼쪽)이명한 원장이라는 다른 축이 없었다면 <싸인>이 이렇게 탄탄해질 수 있었을까. 윤지훈(박신양)이 이상을 담당한다면 이명한(전광렬)은 현실을 담당한다.
(아래 중간)윤지훈(박신양)과 정우진(엄지원)이 오래 전 연인 사이였다는 건 여기저기에 단서가 뿌려져 있다. 일본의 한 산사에 걸려 있는 두 사람의 사진, 그리고 단란했던 한때.
(아래 오른쪽)고다경(김아중)의 머리 스타일과 패션이 화제다. 수수한듯 스타일리시한 일명 꽃거지 스타일. 함부로 시도하다간 그저 ‘남루해’ 보일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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