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7, 2011

단아함으로 빛나다 한 혜 진

“한복과 잘 어울린다는 소리가 기분 좋은,
내 나이 스물아홉”


폭설에 이어 추운 날씨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SBS 드라마 <제중원> 촬영에 한창인 한혜진을 만나기 위해 경북 문경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문자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기자님, 날씨가 많이 추워요. 따뜻하게 입고 오시는 거죠?” 한혜진의 매니저였다. 차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접어들 때쯤 또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점심은 먹고 오시는 건가요?”
<제중원> 촬영은 문경새재도립공원 내에 위치한 드라마 세트장에서 있었다. 도립공원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맑은 날씨임에도 바람을 따라 간간히 눈발이 날리곤 했다. 하늘이 아닌 산으로부터 날아오는 눈이었다.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한혜진을 찾았다. “석란아! 누가 찾아오셨네.” 임시로 만들어놓은 대기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한혜진과 그곳까지 오는 내내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주었던 매니저였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추우시죠?”
대기실에 있었는데도 한혜진의 두 볼은 빨갰다. 한복은 얇디얇아 보였다. 새벽부터 내내 야외촬영이 이어졌으니 정작 추위와 피곤에 지친 사람은 본인이었을 터. 그럼에도 미안한 눈으로 기자를 걱정했다. 그녀를 만나본 팬이나 기자들이 한결같이 “한혜진은 연예인 같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인 듯했다.
동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배우
기자의 눈을 먼저 사로잡은 건 화려한 의상이었다. 한혜진은 한복이 정말 잘 어울렸다. 우아한 목선과 앞가르마를 타 길게 땋은 머리, 단아한 걸음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복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제중원>의 시대적 배경이 구한말이라 전통적인 한복이 아닌, 개화기 때의 한복으로 색깔이나 무늬가 과감하고 화려했다. 이날 한혜진은 다섯 벌의 한복을 갈아입으면서 촬영에 임했다. 그녀가 맡은 ‘석란’은 역관의 딸로서 서양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신여성이자 한국의 첫 양의(洋醫)다. 이 역할을 표현해내는 데 의상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한혜진은 한복의 아름다움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와이어가 부착된 속치마를 겹겹이 입어야 해서 화장실 갈 때 무척 불편해요. 화장실 갈 때마다 오래 있으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시더라고요.(웃음) 추운 것도 단점이에요. 안에 잔뜩 껴입고 있는데도 한복을 입었다는 생각만으로도 왠지 춥거든요.”
한혜진은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바로 패딩 점퍼를 걸치고, 핫팩을 넣은 장갑을 끼고, 고무신을 부츠로 갈아 신었다. 하의는 여러 벌 겹쳐 입을 수 있지만 상의는 다르다. 개화기 때 한복이라 소매 폭이 유난히 좁아 내복을 입기도 힘들다.
“야외촬영이 많아서 어려워요. 그래도 함께 촬영하며 드라마를 전개해나가는 게 즐겁죠. 대본이 정말 재미있기 때문에 촬영을 하면서도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어요. 즐겁게 촬영하는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녀는 추운 날씨 속에서 지치기는커녕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함께 연기하는 배우 박용우, 연정훈과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촬영하고 있었다. 몇 시간씩 야외촬영을 하느라 입이 얼어 NG가 나는 상황도 이들에게는 즐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제작발표회 때마다 으레 나오는 “촬영현장 분위기가 좋아서 피곤한 줄 모르겠어요”라는 말이 진심이었구나 싶을 정도였다.
“제가 맡은 ‘석란’은 이 시대 일반 여성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요. 말투나 행동에서 남들보다 앞서려고 하죠. 남자와 어울리기 힘든 시대임에도, 처음 알게 된 남성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성향도 있고요. 석란처럼 저도 함께 연기하는 박용우 씨나 연정훈 씨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서려고 해요. 그런 노력들이 연기할 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떼루아> 실패 이후,
오히려 편안해졌다

한혜진을 이야기하자면 <주몽>을 빼놓을 수 없다. <주몽>은 그녀를 예쁜 연기자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그러나 ‘소서노’의 이미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또다시 사극을 택하기까지는 긴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다.
“제가 정말 두려워하고 못한다고 생각하는 장르가 사극이에요. <주몽>에서의 이미지가 너무 컸기 때문에, 사극 제안이 있을 때마다 망설여왔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떼루아>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니 피하지 말고 부딪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떼루아>는 그녀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모두 시청률 면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오히려 성공만 거듭해온 상황이 그녀를 더욱 부담스럽게 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선택하기에 앞서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따라다녔다. <주몽> 이후 1년 반 정도를 쉬면서 좋은 작품을 흘려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떼루아>의 실패  이후 그녀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이 작품을 만났을 때, 부딪쳐서 넘어서보자는 도전의식이 마구 솟아났어요. 다시 사극에 도전해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죠. 홍창욱 감독은 제게 ‘한혜진 씨 외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거짓말이라도 그 말을 믿고 싶었죠. 사극이 제일 자신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두렵기도 하지만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촬영하고 있어요."
<제중원>의 시청률은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일단 ‘석란’의 도전은 성공이다. 한혜진 특유의 건강한 이미지는 쾌활하고 호기심 많은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서양 사상에 일찍 눈을 뜬 여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몽>보다는 시대가 많이 올라와서 편해요. 사극 말투도 거의 안 써요. 개화기 시대 신여성 역할이라 사극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조금은 자유롭게 연기하려고 하죠.”
신여성, 그중에서 ‘의사’는 꽤 매력적인 캐릭터다.
“원래 전문직 여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의사 역은 처음이라 걱정도 됐죠. 어릴 적 천식을 앓아 병원에 들락거렸던 적이 있는데, 당시 만났던 의사에 대한 나름의 동경도  있었어요. 의사 역할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석란 캐릭터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 같아요.”

나얼과 결혼? 지금 이대로가 좋고 편해오후 4시가 되자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내내 반사판을 들고 있던 스태프들은 길게 전선을 드리워 조명을 준비했다. 한혜진은 네 벌째 한복을 갈아입었다. 이날 촬영도 늦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피곤한 가운데에도 그녀는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상대 배우 클로즈업이라 목소리와 어깨만 살짝 나오는 데도 힘을 빼는 법이 없다.
“감독님은 한 번 찍으면 대부분 오케이를 하시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지 잘못하면 어느새 카메라를 옮기고 있어요. 드라마는 순발력이 중요해요. 또 그런 면에서 매력이 있는 것 같고요.”
한혜진의 2010년은 뜻 깊게 기억될 듯하다. 그녀는 1월초 드라마 <제중원>과 영화 <용서는 없다>로 동시에 팬들을 만났다. 주연을 맡은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아직도 나에게 과분한 자리라고 생각돼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연기자들이 작품의 기회가 없어서 쉬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동시에 할 수 있으니 감사하네요.”
한혜진은 5년째 나얼과 공개 연애 중이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했던 “결혼하려고 연애하는 것 아닌가요?”라는 말이 “결혼하고 싶다”로 바뀌면서 결혼설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다.
“주변에서 ‘너무 오래 연애하면 힘들다, 결혼하라’고 많이 말씀하세요. 그런데 저희는 지금 상태로도 아주 좋고 편해요. 또 제가 열심히 일해왔던 것처럼 남자친구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열어주고 싶네요.”
기자는 한혜진에게 초콜릿을 선물했다.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이 낱개 포장되어 있는 버라이어티 팩이었다. 그녀는 초콜릿 박스를 들고 스태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기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나눠 먹어도 되죠?” 초콜릿은 스태프들에게 하나씩 돌아갔다. 내심 한혜진 혼자 먹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해가 떨어지고 쌀쌀해진 촬영장에 다시 온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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