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성공 이후, 문근영이 택한 작품은 다름 아닌 연극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맡은 역할이 <클로저>의 ‘앨리스’라는 사실이다. 앨리스는 스트립 댄서다. 클럽에서 비키니만 입은 채로 춤을 추며,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이 다가올 정도로 섹시하고 도발적인 여자다. 섹스에 관한 거침없고 직설적인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다. 순한 눈빛을 가진 문근영과는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캐릭터다.
일단 무대를 통해 만난 문근영은 놀라웠다. 이제껏 전혀 접하지 못했던 도발적인 모습에 놀랐고, 생각보다 그 모습이 잘 어울려서 또 한 번 놀랐다. 마치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의 여동생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연기나 대사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요.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알 만큼 아는 나이니까요.(웃음) 다만 앨리스가 가만히 있어도 매력적이어서 사람을 끌리게 하는데, 제가 과연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까 부담되고 걱정됐죠. 아직은 깊은 맛을 내기에는 부족함도 있어요. 그저 열심히 공부할 뿐이죠.”
무대에서 ‘인간 문근영’ 보여줄 터
여러 가지 생각이 문근영을 무대로 이끌었다. 우선 그녀는 “배우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대에 대한 열망과 욕심”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여기에 <신데렐라 언니>를 통해 만난 선배 김갑수의 독려가 본격적으로 불을 지피게 했다.
“오랫동안 무대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전 작품을 선택할 때 재미있고 흥미 있게 연기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클로저>는 재미있는 작품이었고, 선뜻 출연을 결심하게 됐어요. 또 <신데렐라 언니>를 찍을 때 김갑수 선생님이 연극이 많은 도움이 될 거고,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하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처 내지 못했던 용기를 내게 됐죠.”
오랫동안 그녀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문근영’이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 갇혀 누가 문근영이고, 문근영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호해지는 경험을 했다.
“가끔씩 내가 ‘문근영’으로 있는 건지, ‘사람들이 바라는 문근영’으로 있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어 외롭고 슬펐어요. 그러나 무대에서는 ‘인간 문근영’으로 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스스럼없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좋고 사는 것 같아요.”
연극은 완전히 새로운 작업이었다. <바람의 화원>으로 연기 대상을 받고, <신데렐라 언니>를 통해 ‘미친 존재감’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지만, 무대에 서기 위해서 기초적인 발성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동안은 마이크가 목소리를 잡아주니까 또렷하거나 크게 하지 않아도 됐거든요. 그런데 무대에서는 대사 전달에서 문제가 생기더군요. 첫 연습 때부터 소리를 고루 크게 낼 수 있도록 훈련했어요. 발성 연습을 한다고 하는데, 아직 턱없이 부족한 면이 많아요.”
목소리뿐 아니었다. 편집으로 완성되는 드라마에 비해 날것의 연기를 보여주는 연극은 액션부터 호흡까지 많은 걸 신경 써야 했다.
“드라마는 내 온몸으로 연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화면에 나오는 건 얼굴뿐일 때가 많잖아요. 연극에서는 전체가 다 오픈되니까 좀 더 신경 쓰게 돼요. 그리고 배우들과의 호흡도 신경 써야 하죠. 드라마는 호흡이 썩 좋지 않아도 편집을 통해서 좋게 보이게 하거든요. 촬영할 때는 별로인데 그럴듯하게 나올 때도 있고요. 연극은 그런 게 안 되니까 무대에서 배우와 더 호흡해야 하죠.”
연습과 실제는 또 달랐다. 그녀에게 무대와 객석은 너무도 넓은 공간이었다. 첫 무대에서 이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떨림이 온몸을 지배했다.
“무대에 서기까지 정말 하나도 안 떨렸어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랐는데 너무너무 떨리는 거예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되뇌어도, 어느 순간 떨고 있더라고요. 그 떨림 때문에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죠. 그러면서 한편으로 책임감이 많이 들더군요. ‘이제껏 이런 책임감을 갖고 연기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첫 무대 이후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연인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면 쿨하게 보내줄 것
<클로저>는 극작가 패트릭 마버의 대표작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어 세계 팬들을 열광시킨 작품이다. 앨리스, 댄, 안나, 래리, 네 남녀의 아슬아슬한 사랑 이야기로, 댄이 앨리스와 안나를 동시에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클로저>가 무거운 사랑 이야기라는 건 맞지만 불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사랑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남녀의 사랑이 어쩌면 우리 곁에 있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사랑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네 남녀의 모습을 통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앨리스는 모든 것을 다 걸고 사랑한다. 떠난 남자에게 복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때는 받아주는 여인이다. 문근영은 “앨리스의 사랑법이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제가 그동안 사랑을 해봤다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안 해본 건 아니거든요. 저도 앨리스처럼 순간의 사랑에 솔직하고 올인할 수 있는 사랑이 좋아요. 그렇지만 사랑의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아닐까요.”
만일 문근영이 앨리스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게 되면 어떨까. 그녀는 질문을 받자마자, 주저 없이 “보내주겠다”고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보내줄 것 같아요. ‘너보다 저 여자가 좋아’라고 하면 그 여자와 사랑하게 하는 게 맞는 것 같고, 그게 저도 행복할 것 같아요. 아직 그래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요.”
일과 사랑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라는 질문에는 “둘 다 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야무지게 대답한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또 운명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쩌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분위기가 됐다. “내일 촬영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가 있다면?” 그러자 그녀는 똑 떨어지는 대답을 돌려준다. “촬영이요. 책임감이 있으니까요.”
‘국민 여동생’ 이미지,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
문근영을 따라다니던 ‘국민 여동생’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바뀔 듯하다. 오랫동안 그녀는 여동생으로서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여동생도 어느덧 여자로 성장했다. <클로저>의 선택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여동생’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국민 여동생 이미지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짐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봐주는 사람이 그렇게 보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니까요. 이미지는 한순간에 생긴 게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라서 어떤 작품을 ‘후끈’하게 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요. 그건 앞으로 제가 평생 연기하면서 풀어가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그러나 배우 문근영은 조급하지 않다. 답답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노력이 있다면 얼마든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예전에 비해 마음이 좀 더 편해졌어요. 저는 나이를 안 먹을 줄 알았는데, 나이를 한 살씩 먹고 있더군요. 또 저를 바라보는 분들도 나이를 먹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요. 제 이미지를 개인적으로는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도 <클로저>는 그 노력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가짐이 새롭다.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앨리스와 비교될 때마다 “나만의 앨리스를 만들겠어”라는 오기도 생겼다.
“앨리스는 저와 나이가 비슷해요. 그래서인지 앨리스가 늘 도발적이고 섹시할 것 같지는 않아요. 저는 당연하게 그녀에게 소녀 같은 모습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어쩌면 그것이 저만의 앨리스를 표현하는 방식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내면의 깊은 연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공연 끝날 때까지 갖고 가야 할 고민거리라고 생각해요. 저만 느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과 정서를 관객들하고 함께 느껴야 하잖아요.”
이제 막은 올랐다. 문근영은 꼼짝없이 10월 10일까지 앨리스로 살아가야 한다. 연극이 끝날 때쯤 되면 그녀는 아마 무대를 통해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걷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제가 40회 정도 공연을 해요. 그 기간 중 딱 한 번이라도 관객과 같이 울 수 있는 순간이 있었으면 해요. 공연이 끝나고, ‘앨리스는 너밖에 없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럴 수 있도록 노력, 또 노력해야겠죠.”
종종 아역 배우가 성인 배우로 가는 통과의례로 노출 연기를 감행하기도 한다. 물론 <클로저>에도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골반춤을 주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연극은 연기의 폭을 넓히면서도 훨씬 안전하고, 연기력까지도 높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역시 문근영은 똑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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